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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을 찾아서/이름없는 별 하나

일펌>북한사상 최대의 숙청 '심화조 사건'에 대해 ARABOZA

by 윙혼 2018. 9. 5.

출처 : http://www.ilbe.com/10715752144





뽀그리우스라는 코믹한 별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김정일도 20세기 어느 독재자 못지 않게 권력욕이 강했고 냉혹하며 치밀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직 후계자였던 시절, 자신의 권력을 끊임없이 위협하던 자신의 작은아버지 김영주(김일성의 동생) 및 김영주와 가까웠던 자신의 이복형제들을 숙청하며 후계자 자리를 굳혔다. 김정일이 얼마나 교활한 인물인가 하면, 그는 무력을 써서 정적들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김일성에게 김영주와 이복형제들을 모함하여 김일성의 손으로 평양에서 몰아냈던 것이다. 영화를 전공했던 그는 탁표절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뛰어난 연출력을 갖고 있었고 혁명원로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김정일은 여우의 교활함 뿐만 아니라 사자의 흉폭성도 지닌 인물이었다. 그 흉폭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사건이 김정일 집권기 최대의 숙청사건으로 불리는 심화조 사건이다. 당시 1990년대 북한을 들이닥친 흉년과 경제난으로 김정일의 권력기반은 심하게 약해져 있었다. 이 때에는 남한에 김대중-노무현 친북정권이 들어서기 전이었기 때문에 김정일은 권력 구조의 불안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 김정일이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마오쩌둥의 펑더화이 숙청, 그리고 김일성의 김창봉 숙청 등의 전례에서 드러나는 정책의 실패를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수법이었다. 이 거대한 계책을 실현에 옮기기 위해 김정일은 자신이 신임하는 부하를 불렀다. 그가 바로 장성택이다




장성택은 김정일이 후계자 시절이었을 때부터 그에게 줄을 댔던 김정일의 최측근이었다. 그러나 장성택은 권세가 생기면 바로 횡포를 부리는 인물이었다. 그때문에 장성택은 인심을 잃었고 김일성의 측근들은 장성택을 내칠 것을 권해왔다. 그러나 김정일은 장성택을 자신의 충견으로 지목한지 오래였고 (문재인이 김경수 버리지 않듯이) 장성택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김정일의 보호 덕분에 장성택은 좌전에서만 머무르고 재기에 성공한다. 김정일 왜 그렇게 장성택을 아꼈을까? 아마도 장성택이 너무나 미천한 신분이다 보니 자기를 절대 배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자신을 후계자로 발표하자마자 김일성의 측근들을 자기 사람으로 포섭하는 일에 매달려 순식간에 김일성을 사실상 고립시키는 수완을 발휘한다. 마치 세자로 책봉되자마자 부왕의 측근들을 전부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놓은 꼴이었다. 김일성은 죽기 전에 김정일에게 너무 빨리 권력을 물려준 일을 후회했다고 한다. 한편 장성택은 김정일이 후계자였던 시절 자신을 견제하던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김정일로부터 정치공작을 벌이라는 명령을 받자 장성택은 빠르게 움직였다. 1997년의 일이었다




제일 먼저 희생양이 된 인물은 당시 중앙당에서 농업비서 자리를 맡고 있던 서관희였다. 이는 김정일이 식량난의 책임을 실무자들에게 떠넘기려는 수작이었다. 서관희는 모진 고문 끝에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하였고 공개처형 당했다. 이는 일본에서도 매우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였다




서관희




김정일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사건을 좀 더 확대할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서관희의 전임자들까지 전부 간첩으로 몰아가는 대숙청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은 일선에서 물러난 김일성의 측근들까지 잡아들여 숙청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심화조(深化組)란 문자 그대로 사건을 심화시키기 위한 조직, 바로 숙청을 확대하기 위해 김정일이 장성택에게 조직하게 한 특별수사기관의 이름이다




초법적인 수사권을 부여받자 비로소 장성택은 복수에 나섰다. 바로 자신을 끊임없이 견제하던 중앙당 책임비서 문성술을 겨냥한 것이었다. 중앙당의 책임 비서라면 서열로는 김정일 다음 가는 북한의 2인자이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에 등장한 장성택은 개의치 않고 문성술과 그 일가족을 전부 간첩으로 몰아 체포했다. 그때부터 숙청 열기에 불이 붙었다. 문성술 계파의 모든 인물들을 남조선과 내통한 간첩으로 몰아 닥치는 대로 숙청했다. 이 정치공작을 위해 약 25000명이 숙청되었다




문성술



심화조 사건은 식량난을 초래한 김정일 정권에 대항할 가능성을 미리 뿌리 뽑는 것이 목표였다. 심화조 사건에서 숙청된 사람들은 주로 김일성 밑에서 중책을 맡아온 사람들 이었는데 김정일이 다루기 까다로운 구신(舊臣)들이었다. 심화조는 이들을 남조선의 간첩으로 몰기 위해 극악무도한 고문을 자행했다




심화조가 남조선과 내통한 증거로 사용한 근거들은 주로 한국전쟁 당시의 기록들이었고 이마저도 대부분 갖다붙이기 식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전쟁 당시 살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용의자 선상에 올랐다는 의미이다. 남한의 좌파들이 나불거리는 '친일파 청산'을 실제 실천으로 옮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좌파들의 정신적 지주인 북한에서 몸소 보여준 것이다




특히 제일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은 황해도 출신이었다. 심지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마저도 '재수사'를 받고 그 후손들이 간첩으로 몰렸다. 반혁명분자는 3족을 멸해야 한다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의 친척들과 후손들도 전부 지방으로 쫓겨가거나 처형당했다. 남조선 간첩의 친척들이라 하여 숙청된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 15호 정치범 수용소가 확장된다. 이것이 바로 그 악명높은 요덕수용소이다




심화조 사건에서 장성택이 자신의 오른팔로 발탁한 인물이 바로 채문덕이었다. 채문덕은 사회안전부(한국으로 치면 경찰청)의 우두머리였다. 이 당시에는 사회안전부가 국가안전보위부(정보부)와 인민무력부(국방부)의 세력에 밀려나 있었다. 이 일에 불만을 갖고 있던 채문덕은 사회안전부 세력 확대를 위해 인간백정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물론 보위부와 무력부 견제를 위해 안전부를 끌어들인 것은 김정일의 아이디어였다




채문덕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심화조에 체포된 사람들 중에서 약 40%가 처형을 받기 전에 취조 중에 자살했다고 한다. 실제로 자살한 사람도 있었고 혹은 고문 중에 죽은 사람을 자살했다고 조작한 케이스도 있었다. 하도 많은 인원을 체포하다 보니 단시간 내에 자백을 받아 내야 했다. 그 정도로 심화조가 자행한 고문은 잔인함의 극치를 달렸다. 잡혀온 사람이 고문 도중에 사망해도 시체를 그냥 내다버렸다




양팔과 양다리를 뒤로 묶어 천정에 매달아놓고 군화발로 늑골을 걷어차면 늑골이 부러진다. 자백을 하지 않으면 부러진 부위를 계속 걷어찬다. 끔찍한 고통도 고통이지만 부러진 뼈가 내장에 박혀 내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치료는 당연히 기대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이 죽어도 다른 사람에게 죽은 사람의 몫까지 자백 시키면 되니까 고문은 갈수록 심해졌고 사망자가 속출했다




심화조에 체포된 사람들 중 최고 거물이었던 문성술은 고문 중에 사망했다. 채문덕은 자백을 받기 전에 문성술이 이미 죽었다는 보고를 받자 사체에서 손가락을 잘라서 자백서에 지장을 찍으라고 지시했다. 그 정도로 심화조 사건은 무법의 극치를 달렸다. 심화조가 적발해낸 '간첩들'이 워낙 많아서 공개처형이 힘들어지자 심화조는 감옥에 총살대를 보내 감옥에서 곧장 사형을 집행했다. 이 모든 악행을 총괄한 사람이 바로 장성택이었다







모택동도 홍위병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결국 홍위병들을 숙청한다. 마찬가지로 김정일은 심화조 사건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적당한 시기에 이 사건을 마무리 지을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안전부에 크게 위축된 상태였던 인민무력부와 안전보위부에 비밀지령을 내렸다. 무력부와 보위부는 김정일에게 사건을 제대로 보고하기 위해 내사를 하여 심화조의 수사에 위법성이 없는지 조사하라는 것이다. 은폐가 일상화된 북한에서 심화조 사건 당시의 각종 가혹행위가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당시 북한에서 심화조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치를 떨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김정일은 권력을 다지기 위해 벌인 일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고 있음을 깨닫고 직접 명령을 내려 심화조의 숙청을 지시했다. 1999년의 일이었다. 보위부와 무력부가 합동으로 진행한 '역 숙청'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약 6000명의 심화조 수사관들 및 고문기술자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은 총살 혹은 강제노동형 등의 중형을 선고받고 일제히 숙청되었다




심화조 가담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김정일의 총애를 받는 장성택이었다. 채문덕은 장성택의 책임까지 떠넘겨 총살형을 받았다. 김정일은 위상을 뜯어고친다는 명분으로 사회안전부를 인민보안부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조직을 일제히 개편하였다







김정일의 영악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김정일은 자신이 심화조의 전횡으로부터 인민들을 구원했다며 스스로를 인민의 구원자로 포장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생존자들이 석방되어 김정일을 칭송한다는 내용의 영화가 만들어져 북한 각지에서 상영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생존자들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북한 공권력의 가혹행위의 잔인함이 널리 알려지는 역효과도 가져왔다. 더욱 큰 문제는 측근들이 김정일을 불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심화조 사건은 그만큼 극도로 잔인하였고 북한 내부에 미친 충격도 컸다. 아무리 김정일에게 충성해도 언제 피의 숙청을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북한 권력층은 분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주체사상이라는 마인드컨트롤로 유지되던 김일성 체제가 분열되기 시작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김정일의 피의 숙청 때문이었다




심화조 사건을 통해 김정일은 내부 단속에 성공하였으나 결국 더 큰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2000년부터 죽는 날까지 권력에의 불안과 의심병에 빠지게 된 김정일은 군부를 계속 우대하는 동시에 견제하였다. 그리고 김정일은 자신의 통치이념으로 본격적인 선군정치를 내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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