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비디오, 드라마 등으로 명성황후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하지만 그로인해 명성황후가
정확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명성황후가 줄타기 외교를 한것은 단지 자신의 집안이 권력을 잡기위한
방편이엿을 뿐이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람들이 마치 격정의 시대에 국가를 위해 줄타기 외교를
한것이라 말하는 것을 보면 역사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해준다.
-----------------------------------------------------------------------------------------------------
1.대원군을 몰아낸후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 일본과 맺고 대원군 세력 파면, 유폐
2. 1882년 임오군란 / 원인: 민씨정권의 부정부패
하급 군병과 서울 빈민층의 민씨정권에 대한 투쟁을 촉발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민비를 공격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몰려가 민겸호·김보현 등을 살해하고
민비를 찾기 위해 사방을 수색했다.
민비는 청나라에 자기 백성 죽여달라고 요청 / 그후 학살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요청에 의해 청나라에 붙잡혀감
*대원군의 첫째아들 완화군 사망 완화군을 낳은 귀인 이씨는 슬픔에 사망/ 명성황후의 모략
3.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민씨정권의 친청수구정책은 날로 횡포를 더해갔고, 청국은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의 식민지 지배 를 획책함
4.임오군란으로 민씨가 권력을 독점하자 개화파가 갑신정변 일으키자
청나라를 끌어들여 개화파 학살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군에 의해 살해되고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급진 개화파는 몰락하게 되었다.
4.1894년 동학 농민 운동 / 전주성이 점령 되자 민비 세력은 크게 당황해서
청나라 에게 자기백성을 죽여달라고 요청 / 일본 역시 군대를 보낸다. / 그후 학살
--------------------------------------------------------------------------------------------------
이렇듯 명성황후는 개혁을 극도로 싫어하며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는 외국군인을 끌어들여 자국국민을
학살하는 것을 쉽게 생각했었다. 정사를 나열한 것만 저정도이고 비사를 나열하자면 정말 악랄하기
그지 없는 악행들도 많다.(비사의 경우 일제의 외곡이 있을 수 있기에 재외)
일본이 명성황후를 죽일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줄타기 외교가 아닌 자신의 권력을 위해 청나라에 너무
가깝게 있었기 때문이였고 명성황후가 청나라를 택한 이유는 예전과 같이 군신관계를 유지한다면 자신의
권력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비난하면서 명성황후를 개혁적인 성향의
지도자라는 착각은 재발 하지말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이 명성황후에 대한 예찬을 하는것을 보노라면.....
'낙원을 찾아서 > 이름없는 별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한미군기지이전 동북공정 그리고 통미봉남 (0) | 2008.12.04 |
---|---|
내가 보는 근대사 (0) | 2008.12.03 |
FTA에 대한 넋두리 (0) | 2008.12.03 |
내가 바라보는 박정희 - 3 (0) | 2008.05.30 |
내가 바라보는 박정희 - 2 (0) | 2008.05.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