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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을 찾아서/이름없는 별 하나

일펌>서양의학의 도래와 근대 일본

by 윙혼 2018. 7. 8.

출처 : http://www.ilbe.com/10610334324




일본에 처음으로 서양의학이 유입 된 건 1567년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데 알메이다(Luís de Almeida)에 의해서였다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였던 알메이다는 나가사키에 도착한 뒤 포교와 의료봉사활동을 벌였고

지방영주의 지원을 받아 외과, 내과, 한센 병과를 갖춘 종합병원까지 세웠다

일본 최초의 서양의학이었다






알메이다 사후 예수회 선교사들이  1620년대까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포교와 의료봉사를 계속하면서

일본 내에 서양의학을 전파했다



그러던 중 1639년 에도막부가 쇄국정책을 실시하면서

이들의 유입은 중단된다




<에도막부>

"개독은 ㅁㅈㅎ"

"서양놈들도 ㅁㅈㅎ"




"외국무역은 오로지 조선과 중국만 허락한다.  허가없이 서양놈들이랑 무역하는 새끼 무조건 사형"




<네덜란드>

"저도 개독국가는 맞는데 선교는 관심없어요. 저랑은 계속 장사하실거죠?"




<에도막부>

"ㅇㅋ 넌 봐줌."





"나가사키에 인공섬 만들어놨으니 여기서 다 해라~~. 나오지만 마~~."




나가사키에 건설 된 인공섬 데지마(でじま)는 일본에서 유일한 서양과의 연결고리였고

이 섬을 통해 유입 된 서양 의사들은 이 작은 섬을 중심으로 의료와 무역활동을 벌였다

이후 데지마에 방문하거나 체재한 의사들은 일본 의학과 의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 1796~1866)




오토 모니케(Otto Mohnike, 1814~1887)




폼페(Johannes Lijdius Catharinus Pompe van Meerdervoort, 1829~1907)




이들 의사들은 의료활동과 동시에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고 본격적인 의학교도 설립했다

데지마 섬으로부터 유입 된 서양의학은 난방의학(蘭方醫學)이란 이름으로 불렸고

이들 밑에서 배운 제자들은 이후 메이지 유신시기 서양의학 도입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8세기 후반 이후 일본인들은 나가사키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서를 직접 번역하기 시작했고

그 대표적인 예가 서양의학서 타펠 아나토미아(Ontleedkundige Tafelen)를 번역한 해체신서(解體新書)이다







"와 씨발 개쩌노? 문화컬쳐다 이기"




이 책은 난학, 즉 서양학문과 의학의 유행을 불러일으켰고

기존의 난방의들과 몇몇 한방의들은 직접 인체해부를 시도 해보기도 했다.



이러한 유행에 힘 입어 서양물이라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막부도

완화 된 조치를 취했다





"서양서적 수입금지 완화한다. 서양서적 번역 허락해준다. 알아서 번역해라."




이 조치로 난학유행은 더욱 번져나갔고 많은 서적들이 번역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단순히 서양의서를 번역하는 수준에 불과했고

난학사숙을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친다 한들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실적을 내지는 못 했다



일본에 유입 된 서양의학이 처음으로 실제적 효과를 보이기 시작한 건 우두법이었다







이미 난학사숙에서 우두에 대한 지식은 배워뒀었지만 두묘가 없었기에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었다

1849년, 마침내 일본에 두묘가 성공적으로 들어왔고

1850년대에 폭발적으로 우두법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난방의들이 주도적으로 보급했지만 한방의들도 우두보급에 앞장섰고

도시 뿐만이 아닌 산간지방 오지 부락민들에게도 우두가 보급됐다







이들 난방의들은 1858년 에도에 종두소(お玉ケ池種痘所)를 세웠다

막부의 공식허가를 받고 세워진 종두소는 막부가 서양의학을 인정함과 동시에

천연두에 대해 한방의의 무력함을 인정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종두소는 현 도쿄대학 의학부의 전신이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 함대가 에도에 찾아와 무력시위를 벌인다

이 흑선내항 사건으로 일본은 쇄국정책을 포기하게 된다

당시 미 함대가 보여준 무력시위에 에도막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와 씨발 이거 가만히 있다가는 좆 되겠다;;"





"서양 과학 기술 닥치는대로 도입해서 근대적 군사력 양성하자!

서양의학도 빨리빨리 배워서 군의 양성해라!"



나가사키에 정부직할의 의학교가 세워졌고

전장치료를 위한 해부학, 붕대법 등 군진의료가 포함되었다

이렇듯 일본 초기 서양의학은 군사적 목적으로 태동되었다







에도의 종두소는 의학소로 개칭되어 더욱 규모가 커졌고 난방의의 위상은 날로 높아져갔다

이들 의학소 학생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많은 수가 군의로 활동했다

막부를 없애고 새로이 일본정부가 된 메이지 정부 또한 서양의학을 대하는 기본 기조는 같았던 것이다








보신전쟁, 서남전쟁을 겪으며 근대전을 치룬 일본은 많은 총상환자가 발생했고

전장에서 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서양의사 뿐이었다

총상환자에게 기존의 한방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씨발 한무당 새끼들 잘난 척은 존나 하더만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노?"




"역시 서양의학 미만잡."




메이지 정부는 전문적인 군의 양성기관을 설립했고

기존의 난방의로 근무하던 의학소 의사들과 학생들을 대거 군의로 채용했다

1639년 이래로 계속해서 유입되던 난방의학이 근대 의학 도입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독일군 군의였던 뮐러와 호프만을 초빙하여 도쿄의학교의 교육을 맡겼다




"뭐 이리 잡다한 게 많노? 앞으로 싹 다 독일식으로 바꾼다."

"학생들 기초지식 수준이 낮아서 기초수업부터 선행해야겠다. 본격적 의학수업은 그 다음부터다."

"앞으로 도쿄의학교 수업은 이렇게 편성 될 겁니다 ↓"





1876년 도쿄의학교에서 최초로 20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체계적 근대의학 교육을 받은 최초의 의사들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의 의료제도를 모방하여 의학교육과 위생행정 전반에 대한 법제인

의제(醫制)를 발표했다.



의제가 발표 된 1874년 시점에서 양의는 불과 5000여명이었는데

반해 한방의는 무려 28000명으로 전체 의사의 80%를 차지했다



"씨발 쓸모도 없는 한방의가 80%나 돼? 아 뒷골..."




"양의사 숫자가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포함시켜주긴 했지만 서서히 도태시켜야지."




<의제 76개조 중 37초>

"종래에 개업하고 있던 학술시험이 필요 없지만 새로  개업하고자 하는 의사는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약제학, 내외과, 병상처방 및 수술 시험을 보고 합격해야 허락해 준다."




<한방의> "??? 뭔 말임 그게?"




"한 마디로 앞으로 의사 개업하려면 서양의학 무조건 필수로 배우라 이기야"




"빼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메이지 정부는 한방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서양의학 중심의 국가의료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계속해서 제도를 정비했다.



1879년 「의사시험규칙」

1884년 「의사면허규칙」 , 「의사개업시험규칙」



공통적으로 서양의학 시험을 통과해야만 개업면허를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비록 한방의학을 금지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오직 서양의사만을 정식 의사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관립, 및 부현립 의학교 졸업생, 혹은 외국대학 의학교 졸업생만이 내무성의 허가를 받아 의사로서 개업할 수 있다."




"한무당 ㅁㅈㅎ"




공중위생보건, 의학교육, 의사면허제도 등을 의제와 각종 규칙으로 정비한 일본 의학은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과 더불어 계속해서 발전했고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괄목적인 성장을 이룬다







1894년 조선에서는 이제마가 사상의학을 발표하고







1899년, 서양의사가 한 명도 없었던 조선정부가 본격적으로 서양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의학교를 세울 때






일본 내에서는 의과대학 졸업자와 전문학교 졸업자, 그리고 의사 면허시험 합격자를 포함해서

1만 5천명의 서양의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두 나라 간의 격차를 실질적으로 보여 준다






참고



「에도 말 메이지 초 일본 서양의사의 형성에 대하여」 -김옥주-


의사학 제20권 제2호(통권 제39호) 대한의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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