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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을 찾아서/이름없는 별 하나

5.18에 대한 팩트정리

by 윙혼 2015. 5. 29.





인터넷 게시판에서 5.18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나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조갑제 기자님의 5.18 강연을 인용했더니 단 한사람의 말일 뿐이라서 소수의 의견이라는 것이다. 5.18은 그동안 많은 수사가 이루어졌고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는 사건이다. 조갑제 기자님은 강연에서 유네스코 자료와 검찰, 국정원의 조사 자료를 종합해서 발표 한 것인데 이것이 왜 소수의 의견으로 둔갑 되었을까?


학계의 논문들을 보면 천편일률 적으로 당시 군인들의 강경진압이 시민들의 무장봉기를 야기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조갑제 기자님은 시민들의 폭력시위가 강경진압을 불렀고 군인들의 최초발포 과정 역시 군인들의 보호본능에 의한 정당방위라 말하고 있다. 이런것이 단순한 자료 해석의 차이일까?



5.18은 처음에는 사태로 불리다가 민주화 운동으로 바뀌었는데 민주화 운동이 된 이유는 군인들의 강경, 폭력진압에 시민들이 저항해서가 아니라 5.18 특별법이 만들어 지면서 당시 신군부를 반란군으로 규정했고 그로 인해 국민의 저항권이 적용되어 폭력시위 및 무기고 탈취가 면죄부를 받았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여기서 잠시 상대방이 가져온 자료와 검찰조사 자료를 비교해 보자.

상대방이 가져온 자료를 보면 "광주에서 최초의 발포는 5.19에 있었다. 16:50 광주시 계림동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다가 멈춰선 장갑차를 시위대가 공격하자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차XX대위가 M16을 발포했고, 당시 조대부고 3학년인 김영찬이 유탄에 총상을 입었다. 11공수여단에서 상급부대에 보고를 하지 않은 채 발포사실을 은폐한 것으로 판단된다."라는 자료를 가져왔다.

그래서 검찰에서 조사한 자료를 봤더니 "5.19 17:00시경 공수부대원의 사체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와중에 장갑차가 강력한 포위공격과 최류탄 연기로 인해 방향감각을 상실하여 턱을 들이받고 정지하자, 시위대 수명이 장갑차 위로 올라가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불붙은 짚단을 투척하려 하자 발포"라고 언급되어 있었다. 전자의 자료만 보면 비무장의 시위대를 군인들이 장갑차를 동원해 진압하면서 발포했다는 말이 되지만 검찰의 조사자료를 보면 시민들의 강경시위가 발포를 부른 것이 된다.




얼핏 보면 비슷한 문장이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상대방이 가져온 자료는 검찰조사 자료에 없는 말이 아니고 보고싶은 부분만 발췌해서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없는 내용을 추가하면 바로 티가 나지만 특정 부분만 발췌해서 가지고 오면 바로 티가 나지는 않으면서도 전혀 다른 뜻으로 왜곡이 가능한 것이다.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은 후 학자들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결론에 과정을 짜맞추기 위해서 조사자료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을 발췌해서 인용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군인들의 폭력, 과잉진압이 평화롭던 시민들을 무장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왜곡 된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학술적인 가치관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수는 있지만 조사자료 자체를 수정, 왜곡하는 것은 절대로 용인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학자들이 왜곡한 자료로 논문을 양산했고 5.18 관련 단체들도 이에 편승하며 반대의견은 무조건 마녀사냥을 했다. 그로인해 순수하게 자료만을 정리해서 발표한 것이 소수의 의견으로 매도되는 상황까지 이르른 것이다. 폭력시위의 여부를 떠나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 받았지만 자신들의 행적을 세탁하기 위하여 강경진압을 야기한 폭력시위를 지워 버림으로서 정당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던 군인들을 악당으로 매도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차후 5.18에 대한 역사에 추가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며 하루라도 빨리 당시 국가를 대신하여 법과 질서를 지키려 노력했던 군인과 경찰들의 명예를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3줄 요약

1. 5.18은 검찰, 국정원, 유네스코를 통해 모든것이 밝혀짐

2. 5.18이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은 이유는 평화로운 시민들에게 군인들이 폭력을 행사해서가 아니라 당시 군인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하여 폭력, 무기고 탈취에 대한 죄를 사면받았기 때문

3. 5.18이 민주화 운동으로 확정 된 후 5.18을 순수한 민주화 운동으로 미화하기 위하여 자료를 부분적으로 발췌, 편집한 것이 학계에서 대세로 자리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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