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ueg.net/column001/820783
지난 12일 조선일보가 보도한 인터뷰에서 김지하 시인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부탁한 것 중 유신세력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부분이 실현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굉장한 시를 썼던 시인이기 이전에 시대를 읽을 줄 아는 천재 지식인인 김지하 씨의 안목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렇기에 유신세력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 박정희 정권을 유신 정권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이 만들었던 유신 헌법 때문인데 이 유신 헌법은 박정희 정권의 영구 집권이 가능하게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독재정권의 굴레 그 자체가 된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본래 선거로 당선되고 재선에 성공한 만큼 그의 정치 기간 전체가 독재로만 점철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역시 독재 정치의 주요 요소지만 그것은 전후의 특수성과 뒤떨어진 인권 의식의 탓도 있으니 오로지 박정희 정부의 탓으로 몰긴 힘들어 보인다. 유신 정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어쩌면 박정희 정권을 너무 악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유신 헌법이 그 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박정희 정권이 유신 정권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면서 이 시기에 박정희 정권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유신 세력이라 불린다. 유신 세력이란 혁명가 박정희의 리더쉽 아래에서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이룬 혁명을 수행한 이들 모두를 지칭한다고 보면 옳을 것 같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박정희 정부의 주요 관료들과 지도층 그리고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학자들 까지 포함된다고 본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유신 세력은 이들과 함께 근대화를 이룬 이른바 산업화 세대 전체가 바로 유신세력이라 지칭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유신 세력은 어떻게 보면 혁명가 박정희의 세력이라 말해도 전혀 잘못 된 것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유신 세력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얼핏 생각하기엔 굉장히 옛날 느낌이 나기 때문에 구태한 집단 같다.
좌파는 유신 세력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 무자비함과 독재 그리고 정치 탄압만 언급하려 한다.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 봤자 물욕과 권력욕으로 뭉친 집단 취급하기 일쑤이다. 또한 수구반동으로 몰기도 하고 이른바 '친일수구세력'의 중추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묘사나 우리 젊은층이 가지는 이미지와 달리 유신 세력은 한반도 역사에서 흔하지 않은 급진 혁명 세력이다. 이들이 이룬 이른바 '한강의 기적'은 서구에서 백 년 이상 혹은 수 백 년도 걸려서 이룩한 사회 변화를 수 십 년 동안에 실현시킨 '진보'의 결과물이다. 유신 세력은 단지 경제를 부흥시킨 것이 아니라 38선 이남 지역의 산업 구조를 바꾸었으며 국민들의 삶의 형태를 혁신했다. 그리고 나아가 사회의 구조와 가치관 까지 몽땅 바꾸어 놓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이후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유신 세력은 수구 세력으로 탈바꿈 했을까? 물론 앞 서 언급한 넓은 의미의 유신 세력은 그렇게 바뀐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결과물을 무너뜨리려는 시도에 강한 반발감을 보이는 것이 바로 산업화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에 분노한 산업화 세대가 높은 투표율로 박근혜 대통령의 정권을 창출하는데에 큰 힘이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유신세력 즉 박정희 세력의 핵심 인물들은 어떨까? 놀랍게도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혁명 과업을 중단 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 앞에서 과업 완수를 보고한 박태준 전 총리와 죽는 순간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혁명 과업 수행에 대해) 보고 드리러 가겠단 말을 남긴 최필립 장수장학회 전 이사장이 아닌가 싶다.
박태준 전 총리와 최필립 전 이사장의 경우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유신세력이 끊임 없는 좌파의 비난과 공격 속에서도 자기 위치를 고수하며 끊임 없이 죽은 박정희 대통령이 추구한 목표를 향해 인생을 바치게 된 이유로는 먼저 단순히 수 십 년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의 수 백 년 후를 바라보고 비전을 정한 박정희 대통령과 유신 세력의 진취성을 먼저 꼽아야 한다고 본다. 사용 할 사람이 없다는 비난에도 더 먼 미래를 바라 보며 넓은 도로와 사회적 기반을 건설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심지어 철도 건설을 하면서 더 이후를 위해 주변 토지를 미리 확보해 둘 정도로 현 시대를 기준으로도 더 먼 미래를 염두에 둔 정책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이념과 각오를 이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물론 유신 세력이 다시 시대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무리한 점이 많다. 먼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불가피했다고는 하지만 독재의 원죄가 따라 붙을 수 밖에 없다. 현 시대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엔 족쇄를 차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또 다른 문제는 수 십 년 전 유신 세력이 먼 미래를 보고 정책을 수립한 것 처럼 이제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먼 미래를 바라보고 새로 정책을 수립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그들은 충분히 먼 미래를 염두에 두고 정책을 수립할 정도로 현명했지만 지금은 노인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현 세대가 그들의 현명함을 배워 짧은 안목이 아니라 긴 안목으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무리 유신 세력이 마음은 젊고 여전히 혁명가의 각오로 차 있다고 하더라도 세대는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운동권 진영이 하는 것 처럼 유신 세력이 수구 반동이냐는 견해를 보인다면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유신 세력은 여전히 진취적이다. 그들의 급진성은 그들이 이루어낸 사회적 변화로 인해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뿐이다. 비록 그들이 현 시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더 이상 유효한 혁신을 이룰 능력을 상실했다고 해도 끊임 없이 변해야 한다는 발상은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적인 예가 바로 박근혜 정부가 중점을 두는 '창조 경제'이다. 비록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지만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변화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점은 유신 세력이 급진 세력으로서의 습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비해서 운동권 진영은 80년대의 향수에 젖어서 당시의 발상과 목표를 그대로 현 시대에 추구하려 든다.
어쩌면 유신 세력이 다시 우리 사회의 중심에 선 것은 여전히 혁명 과업을 더 추진하겠다는 유신 세력의 과욕 뿐만이 아니라 이들을 대체할 만큼 진취적인 집단이 우리 사회에 등장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물론 넓은 의미의 유신 세력인 산업화 세대가 피와 땀으로 이룬 우리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의 토대 위에 있는 현재로는 이들 만큼 급진적인 변화를 도모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 사회가 인정할 만한 진취성과 비전을 보여준 세력이 등장해야 할 시기가 아닐까? 이른바 민주화 세력은 나름의 역할을 했지만 급속도로 보수화 되어버린 상황에서 민주화 세대 이후의 젊은 층은 이들을 급히 대체하는 진보세력을 형성 할 짐을 지게 된 것이다. 민주화 세력이 좀 더 합리적이고 시대 변화에 적응해 줬어야 한다는게 필자의 견해다.
결국 민주화 세력의 급속한 노화와 준비되지 않은 젊은층의 미약한 세력은 과거의 급진 세력이 전면으로 나와 이들을 대신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을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자면 이른바 '젊은 우파'가 세력화 하고 있는 과정에 민주화 세력이 너무나 일찍 진보 진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과거의 용사들이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 남은 사명감을 불태워야 하도록 만든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오죽하면 그들이 다시 등장해야 하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는 곧 거시적으론 대한민국 사회 자체가 노화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 이제 세력화가 진행되고 있는 대한민국을 부정하지 않는 젊은 2~30대가 서둘러 신진세력을 형성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필요하다고 저절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PS : 트윗 중 정말 마음에 닿는 글이 있어서 뉴제네(http://neueg.net/)의 편집장님께 해당 글에 한해서 블로그에 퍼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낼름 업어왔다. 인터넷 여론이 지나치게 좌경화 되면서 5.16과 유신이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런 글이 알려지면 나쁘게만 보던 사람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될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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