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항일무장독립운동가 이범석으로 보는 친일청산 논리반박 | 일베-일간베스트 | 일베저장소 (ilbe.com)
조선해방과 대한민국 독립은 다르다
1945년 8월 15일 조선 해방은 항일운동가 그 누구도 자주적으로 이루지 못한 미완의 업적이며 조선은 미국(원폭)에 의해서 해방을 당했으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독립은 이승만과 뜻을 함께한 이들이 반공을 기치로 단결해서 쏘련 스탈린 엉덩이를 핥고 마오나 빨던 항일빨갱이들의 난동을 제압해서 이룩했고 또한 항일 빨갱이들이 대한민국을 침략하고 대한민국 민족을 학살한 민족반역 범죄를 응징했다
조선은 일제시대 부역을 했으며 이는 SCAPIN 1757 문서로 충분히 확인이 가능하며 조선인에 의한 조선해방은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실패했다. 조선해방은 독립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였을 뿐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대한민국 독립은 과거사 불문하고 공산전체주의와의 투쟁 즉 반공을 해서 위대한 자주독립을 이룩한 나라이며 이는 창군과정에서 확인이 된다. 국군 창군과정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했던 1948년 대한민국 독립과정과 이후의 이범석 행보를 보면 좌익들에 의한 해방이후 좌파들이 주장하는 친일파 청산논리는 가볍게 격파가 된다
독립군 광복군 두개의 타이틀을 가진 철기 이범석 장군이 누군지는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거다. 이범석은 국군 창군과에서 광복군 일본육사(및 만주군) 학병출신 장교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떤 가치를 부여했는지 잘 나타나 있으니 앞으로 역사 족?도 모르면서 나대는 분탕들이 대한민국은 친일파 청산을 못했네라고 지랄하면 너같은 분탕 빨갱이들 잡을려고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일제 부역자들을 기용했다고 반박하면 된다
대한민국 국군 창군과 이범석의 인재등용
창군과정에서의 인력흡수를 보면 대한민국의 건국가치가 어디에 있었는지 충분히 알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창군과정에서 항일은 실질적인것이 아닌 상징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했고 일제 부역자들이 실질적인 축을 담당했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정부수립과정에서 내각구성이나 각부처 수립당시 인력 기용을 봐도 각 부처 장관들은 항일운동가로 배치하고 행정 군사 법조등의 하부조직 실무는 일제시대 부역 또는 경력자들을 활용한것이다. 그리고 항일 빨갱이 새끼들 잡는것은 건국에 참여한 항일 운동가들의 기본 방침이였다
자 창군과정에서 철기 이범석 장군이 세운 창군 원칙을 볼까?
이범석 국방장관은 "국군을 육성하는데 있어서 장교의 질은 일본 육군 사관학교 출신자를 우선으로 사병 제일주의와 정신면에서 광복군의 독립투쟁 정신을 계승하며 강병 육성의 장래를 학병 출신의 장병에게 건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 국방부 군사 편찬 연구소 625전쟁사 제4절 창군의 과정 - |
이는 국군의 정신적인 뿌리는 광복군이 장장 실무적인것은 일군육사 출신들이 국군 발전에 대한 기대는 학병출신(당시 엘리트)들에게 역할을 부여했다고 이해하면 되며 매우 유효적절하고 합리적인 방침이라고 개인적으로 평가한다
국군 3대 맹서
과거나 현대나 분탕 빨갱이들이 국군에 위장입대하여 여순 14연대 대구 6연대가 군내 반란사건을 일으키자 이범석은 대한민국 민족을 학살한 범죄자 빨갱이 새끼들을 발본색원했고 북조선과 대한민국내 항일 빨갱들이 난동부리지 못하도록 정신교육을 강화하고자 만든것이 3대 맹서이다. 항일빨갱이들만을 골라빠는 분탕 좌좀들은 창군과정에서 광복군만을 뿌리로 한다만 강조해서 날조 선동하지만 실제는 출신불문하고 협심해서 항일 빨갱이 잘 때려잡으면 된다였다. 이는 3대 맹서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
국군 3대 맹서 국군 3대 선서(國軍三大宣誓) 1. 우리는 선열의 혈적을 따라 죽엄(음)으로써 민족국가를 지키자 2. 우리의 상관 우리의 전우를 공산당이 죽인 것을 명기하자 3. 우리 군인은 강철같이 단결하여 군기를 엄수하며 국군의 사명을 다하자 |
과거사 불문하고 반공으로 대동단결
분탕 좌좀들이 마치 일제 부역자들이 자신들의 행적을 숨기고 대한민국 정부에 기생한것 처럼 포장하지만 일제시대에도 해방후에도 일제시대 행적은 아주쉽게 노출되었고 누구나 알수 있었다. 특히 일본군 육사출신이자 중일전쟁 당시 대대병력으로 국민당군을 패주시킨 김석원 장군같은 경우 조선인 전쟁영웅 취급을 받았다. 해방후 김석원 장군이 인사차 경교장에 방문했고 김구와 악수를 했고 잘해보자는 썰도 있을정도 일본군 대좌출신 김석원 장군은 한국전당시 패잔병 수습을 하고 전열을 정비한 김홍일 장군과 함께 지연전을 했고 진천전투와 포항철수작전을 완벽하게 수행을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둘의 꼬장꼬장한 스타일은 비슷해서 하급지휘관들이 애를 먹었으나 군의 사기를 올리는데는 귀신같은 능력을 가졌고 애송이? 미 군사고문단하고 잘 맞지 않아서 결국 한직으로 물러나 퇴역한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에 IF는 없다지만 김석원이나 김홍일이 참모총장이 되었으면 한국전 당시 낙동강까지 밀리지 않았을수도.....
좌좀 분탕들은 해방후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일제 부역자들을 당장이라도 때려죽이려고 했다고 선동하지만 실제로 그런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특히 반공 항일독립운동가들은 오히려 민전같은 좌익단체 행동 슬로건으로 일본잔존세력 , 친일파 , 민족 반역자 철저 숙청같은 친일청산을 울부짖고 다닌 항일 빨갱이들을 더 싫어했고 족쳐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실행을 했다
항일독립운동가들과 일제 부역자들의 합동 임관식
당시 시대적 배경에 대한 마사지는 끝났고 분탕좌좀들마저 인정하는 항일의 영웅 윤봉길에게 사제폭탄 제조해준 국민당군 및 광복군 장성 김홍일 장군이 일본군 대좌 출신들과 함께 임관식을 했고 김홍일 장군이 대표로 위의 선서를 했으며 이승만(항일 대통령) 이범석(항일 국무총리겸 국방부 장관) 이재명이 존경한다던 신익희(항일 국회의장)가 행사에 참석하여 축사까지 한것을 알면 당시 친일청산은 시대 흐름이 아니였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당시 신문기사
金弘壹 등 장성 5명의 임관식 거행 대한민국정부가 국제적으로 어깨를 겨누어 굳세게 자라는 이 마당에서 더욱 국토방위의 干城인 국군은 해방 후 모든 형극의 길을 걸어오던 중 거보적인 진보를 보아 이제야 철벽같은 조직으로 점점 日進日步하여 나가고 있는 터에 더욱 지난 22일 오전 10시부터 중앙청 앞 광장에서 해군 군악대 주악리에 5장성의 임관식을 거행한 바 있었는데 씩씩하게 자라는 국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날 대통령 이하 각 장관 급 내빈 다수 참석리에 의례에 이어 대통령으로부터 육군 金弘一(김홍일)· 蔡秉德(채병덕) ·李應俊(이응준) ·宋虎聲(송호성)· 해군 孫元一(손원일) 등 5씨에 대한 准將으로 임관하는 임관장 급 계급장 수여가 있은 다음 대통령, 국방 장관의 훈시가 있었고 신국회의장으로부터 치사가 있었다. 이어서 5장성을 대표하여 김홍일준장으로부터 국가와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선서문 낭독이 있은 다음 동11시경에 폐회하였다. 영예의 임관을 받은 장성들의 약력은 다음과 같으며 식을 마친 후 국군 특별장교로 임관된 軍醫 17명과 법무 20명에 중위로 工兵 32명·통신 40명·예비역 158명 등은 각각 소위로 임관식이 있었다. ◊ 채병덕준장 : 본적 평남 평양, 단기 4247년 4월 17일생, 4268년 6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후 육군중포병학교, 육군포병공학교 각각 졸업, 4269년 중위, 佐世保중포병연대 중대장, 4270년 4월 육군병기학교 교관, 4271년 4월 육군대위, 4276년 12월 육군소좌, 4279년 1월 朝國警正尉, 朝國警參領, 제1연대장, 統衛部병기국장, 국방부참모총장 ◊ 이응준준장 : 본적 서울, 4224년 6월 27일생, 424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4257년 육군대위, 4269년 육군중좌, 4270년 北支師司令部附, 4274년 육군대좌, 4279년 미군정청 국방부고문, 4279년 육군대령 統衛部감찰총감, 4280년 제5여단장, 4281년 제1여단장 ◊ 김홍일준장 : 본적 평북 용천군, 4251년 중국 육군대학 졸업,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8·15 투항후 승리훈장 급 육해공군 1등 獎章 수여 ◊ 송호성준장 : 본적 함남 함흥, 4253년 신흥독립군관학교 졸업, 4256년 保定군사학교 졸업, 4257년 중국 혁명군 上尉참모, 4278년 광복군 고급참모, 4279년 朝警소령 제3연대 중령 朝警총사령관, 4280년 대령, 4281년 총사령관 사임 ◊ 손원일준장 : 본적 서울, 4263년 7월 남경중앙대학 농학원 항공과 졸업, 4263년 중국 海軍部派外國 유학생 시험합격, 독일연습선에 승선, 4268년 선장면허, 4278년 海防병단 조직, 4279년 해안경비대 총사령관, 4280년 해군대령 평화일보 1948년 12월 23일 |
민족반역범죄단 항일빨갱이들에 맞서싸운 광복군과 일본군
1950년 6월 25일 항일 빨갱이들은 대한민국을 침략했고 대한민국 민족을 학살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다녔으며 반공 광복군 춣신들과 일본군 출신들은 대한민국 국군이라는 신분으로 합동하여 치열하게 싸웠다. 특히 6사단 김종오(학병)과 7연대장 임부택(조선인 특별 지원병)은 인민군 2군단을 막아서 인민군의 서울 포위작전을 실패하게 만든 대전공을 세웠고 장철부 기병대대장은 김포지구 전투에서 영등포 진출을 최대한 저지했고 공주전투에서 대전과를 올리고 청송지구 전투에서 대병력과 맞서 싸우다 항일빨갱이들의 포로가 되길 거부하며 자결했다
광복군과 일본군 출신들은 과거사를 문제삼지 않았으며 각자의 포지션에서 각자의 임무에 충실했고 대한민국은 이들의 피땀위에 지켜지고 발전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이들은 항일친일의 조선인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이자 군인으로 반공이라는 하나의 키워드에 단합한 이들이다. 그시대 반공 항일운동가들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생각도 하지않고 지금에서야 항일운동가로 빙의된 정신병자들 보면 이나라는 아직도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 유교탈레반 시대에 있는것 같다
분탕 좌좀들은 김일성이 친일청산을 했다고 알고 있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 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테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오랜 인테리들의 혁명성과 애국적 열의를 굳게 믿으시고 그들을 새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 주시었다" 『조선전사』 현대편 (23편) 「민주건설사 1」 |
요약
해방후 건국에 참여한 반공 항일독립운동가들은 친일청산보다 반공이 우선이였다
항일은 항일대로 부역은 부역대로 새로운 대한민국에 충성했고 합심해서 항일 빨갱이들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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