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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을 찾아서/이름없는 별 하나

대한민국 중화학 공업 필수 요소 세가지

by 윙혼 2017. 11. 28.





얼마 전 같은 우파 성향의 사람과 박정희 전 대통령 임기 말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어. 그러던 중 부마사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상당히 못 믿어 하는 것 같았어. 사실 부마사태에 대한 자료를 좌파 쪽에서는 많이 인용하지만 우파 쪽에서는 거의 금기시 하다 보니 증거 자료로 내밀기 어려울 정도로 왜곡 된 것들이 대부분인 것도 사실이야. 그래서 납득 시키는데 애를 먹었는데 우파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산업화가 큰 위기를 맞은 상태에서 그 분이 서거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던 당시만 해도 한국의 산업화는 큰 위기였는데 왜 박정희는 한국 산업화의 아버지인지 풀어보고 당시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해. 한국 산업화의 필수 요소를 꼽자면 세가지가 있어. 박정희, 전두환, 미국이야. 물론 국민들도 열심히 했고 일본의 지원도 있었어. 일본의 지원이 있었다고 하면 반일감정으로 반발부터 할 텐데 한국의 산업화가 박정희의 사망으로 중단 될 위기에서 일본이 어떻게 한국에 큰 도움을 줬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세가지 필수 요소는 박정희, 전두환, 미국 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게

일단 박정희 전 대통령 산업화의 로드맵을 보면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와서 조립 후 미국으로 수출하면 한국은 인건비가 싸니까 그래도 이윤이 남고 그 상태에서 부품의 국산화 비율을 높이면 점점 이윤이 높아지게 된다는 거였어. 그런데 부품을 차츰 국산화 하다 보니 한계에 봉착하게 되는 거야. 경공업 수준으로는 고부가가치의 부품을 만들 수 없었고 그 상태로는 노동집약적인 저부가가치 산업에 얽매일 수 밖에 없었던 거야. 그래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화학 공업을 육성한다는 결단을 내리게 되지

그런데 한국은 자본도 기술도 인력도 없던 상황이었고 그런 상태에서 중화학 공업은 불가능했었어. 실제로 당시 미국을 비롯한 경제, 과학, 사회 분야의 전문가들 중에서 한국의 중화학 공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전무한 상태였어.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받은 원조와 해외에서 빌린 돈을 꾸준히 중화학 공업에 투자를 했고 미국은 이에 강력하게 반발을 했었어. 이렇게 미국과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한국의 산업화에 심각한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었어. 중화학 공업으로 만든 물건을 미국에 수출하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그러던 중에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 거야. 미국도 자국 사정이 안 좋은데 돈 먹는 하마가 될지도 모르는 한국의 중화학 공업을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압박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핵개발 까지 거론하며 한국의 중화학 공업을 성공시키려고 했어. 하지만 당시 국민들마저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중화학 공업은 실패라 생각했고 민심은 돌아서 버렸지. 그래서 터진 것이 부마사태야. 부산에서 시작된 강경 시위는 마산까지 번지게 되었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 계엄령이 선포되고 결국 민간인을 군법으로 처벌해서 막은 사건이었어

이것을 계기로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하게 되고 한국의 중화학 공업은 그렇게 중단되는 듯 보였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정승화를 비롯한 유신에서 승승장구하던 사람들조차 민주화 세력에 줄을 대려 했고 그렇게 민주화 세력이 집권하게 된다면 그들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생각하던 중화학 공업의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지. 이에 반발해서 일어난 것이 12.12야. 12.12는 권력찬탈을 위한 쿠데타가 아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던 하나회 군인들이 일으킨 의거였어

정승화는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직후 범인인 김재규와 같이 범행 현장을 빠져나왔어. 충분히 조사 대상이었지만 조사 받지 않은 상태에서 계엄사령관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직책을 맡아버린 거야. 그런 상황에서 정승화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유신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을 하게 되지. 민심이 돌아섰고 민주화 세력의 집권이 확실해지자 그 쪽에 줄을 대기 위해서 라고 보는 것이 맞겠지만 김재규와 내통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던 상황이었어

그런 상황을 좌시할 수 없던 하나회 소속의 군인들이 12.12를 일으켰고 정승화를 체포 후 조사했지만 김재규와 공모한 정황은 포착하지 못했지. 하지만 그 후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가라앉게 된 것 같아. 그런데 왜 12.12가 권력찬탈을 위한 쿠데타가 아닐까? 생각을 해 보자고. 70년대 후반에 겨우 북한의 경제력을 따라왔다고는 하지만 무리한 중화학 공업에 대한 투자로 한국은 빚이 상당히 많았고 그런 상황에서 오일쇼크의 직격탄을 맞아서 엄청나게 힘든 상황이었어

단독으로 북한보다 경제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주한미군이 빠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간선제로 대통령 선거하는 것도 용인하지 못해서 주한미군을 철수하려는 미국 앞에서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다고? 한국은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야. 그래서 산업화가 완성될 때 까지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죽어 나갔지. 그런데 미국과 세계를 양분하는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북한과 대치 중인 상황이었어. 그런 상황에서 권력찬탈을 위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을까?

이것과 연계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핵개발도 풀어 봐야해.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핵개발 후 고립되어 장기 독재를 하는 것이 당시 대한민국은 불가능했어. 핵개발도 미국이 한국의 중화학 공업을 지원하게 만드는 하나의 카드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우선 목표는 대한민국의 중화학 공업 육성이었지 핵개발이 아니었어. 당시 상황도 핵개발에 적합하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12.12가 권력찬탈을 위한 쿠데타가 아닌 것을 이야기 하면서 잠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는데 하던 이야기 계속 할게

12.12 직후 미국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진의를 파악하려 했고 미국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은 미국에 자신의 진의를 알렸고 그때 까지만 해도 미국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여져. 하지만 5.18이 터진 후 상황은 급변하게 되지. 일단 5.18을 알려면 10.26 이후 대한민국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부터 알아야 해. 10.26 이후 총리를 맡고 있던 최규하가 임시 대통령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고 최규하는 1년 뒤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해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장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해야 한다며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국민들을 자극하고 있었어. 라이벌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적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더욱 강경하게 국민들을 자극했어. 그로 인해 전국에서 강경시위가 일어나게 되었고 12.12로 전두환이 권력을 찬탈하려 한다는 소문까지 돌게 되었어. 하지만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로 권력을 찬탈할 수 있는 상황은 절대 아니었어. 하지만 광우병, 세월호 사태처럼 유언비어는 사실화 되었고 그런 와중에 일어난 것이 5.18이야

5.18을 본 미국은 한국은 민주주의를 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지. 그래서 전두환이 다시 간선제로 대통령이 된 것을 지켜보며 강력한 지지를 보내게 된 거야.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대체 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하던 중화학 공업이 전두환 전 대통령 때는 엄청나게 잘 돌아갔는지 이유를 모를 거야. 일단 박정희 전 대통령의 중화학 공업 정책은 위기를 맞은 것이지 실패한 것이 아니야. 위험 부담을 안은 투자이긴 하지만 미국이 강력하게 지원해 주면 성공할 가능성도 있었던 거였어

하지만 오일쇼크로 미국도 힘든 상황이 되자 도저히 한국의 중화학 공업에 지원할 여력이 없게 된 거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이 처음부터 잘못된 거라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그것을 성공으로 바꿔낸 것이 되잖아? 물론 위기를 타개하고 한국의 중화학 공업을 성공으로 이끈 것은 대단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이 근본부터 잘못된 것은 절대로 아니었어. 그것이 이어져 나갔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이 된 거야

전두환 전 대통령은 미국이 아닌 일본에게 눈을 돌렸어. 북한은 소련, 중국에게 지원을 받고 있고 한국이 그런 북한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안전 보장에 막대한 기여를 해왔다고 주장하며 일본에 방위차관을 요구했고 미국에 이것을 설득 시켰어. 미국 혼자서 한국을 지원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일본과 같이 한국을 지원한다면 한국의 중화학 공업 육성은 가능하다는 판단이었어. 이런 말을 들은 일본은 처음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미국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리게 되었고 그렇게 전두환 전 대통령은 미국과 일본의 지원을 이끌어내게 된 거야


단순히 차관만 받아오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빌린 돈을 회수하려면 한국의 중화학 공업도 본 궤도에 올라야 하니 기술을 비롯한 다른 쪽으로도 지원을 해주었고 이에 한국은 성실하게 빌린 돈을 갚아 나가며 상호간 신뢰를 구축해 나갔어. 그렇게 한미일 동맹은 더욱 굳건해져 갔고 오일쇼크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로 좌절될 뻔했던 한국의 중화학 공업은 기적적으로 이어지게 된 거야. 아마 그때 일본이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한국은 없었을 지도 몰라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대한민국의 중화학 공업 기반을 닦은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지만 그 마침표를 찍은 사람은 전두환 전 대통령인 이유도 납득할 거라 생각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정말 너무나 저평가 된 인물이야.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결론은 대한민국 중화학 공업의 필수 요소 세가지는 박정희, 전두환, 미국이고 일본 역시 많은 도움을 준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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